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국군의 초기 방어 === 개전 시각이나 첫 교전이 일어난 시각이 언제였는지 참전 용사들의 증언이 매우 엇갈리고, 당시 육본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이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육본 정보국 첩보대 소속인 최학모 중위는 북한군 포성을 최초로 들은 시각을 새벽 3시로 증언한다. 채병덕 총참모장의 부인인 백경화 여사 역시 1960년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참모장의 공관에 남침에 대한 최초의 보고 전화가 온 시각을 새벽 3시로 기억한다고 증언했다. 또한 강릉의 안인진리에 침투한 북한의 육전대(해병대)의 상륙 과정에서 우리 경찰이 교전 중 전사한 시각도 새벽 3시라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일반적으로 육군 본부에서 동시다발적인 교전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한 새벽 4시로 개전 시각을 서술하고 있다. 이때 육군본부에서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당직 장교는 당시 육본 정보국 전투정보과 연락장교였던 [[김종필]] 중위였다. 바로 제4공화국과 김대중 정부 총리를 역임한 그 김종필이다. 당시 육군 정보국에는 정보국장 [[장도영]], 북한관련 책임자 김종필, 군무원 [[박정희]]가 있었다. 김종필은 육본 국장들에게 연락을 취해서 깨웠고, [[당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으나 육본 당직사령은 자신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다. [[채병덕]] 총참모장에게도 바로 연락이 갔으나,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 2시에 들어간 채병덕 총장은 급보를 들었음에도 잠깐 깨서 통상적인 국지전일 거라고 한마디 하고 도로 잤다. 결국 전군에 비상이 걸린 것은 급보가 들어오기 시작한 지 4시간이 지난 오전 7시였다. 이때 국방부 장관 [[신성모]]는 [[개소리|'''"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습니다."''']]'''라며 전화코드 뽑아놓은 채''' 자고 있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10시 30분이 넘어서야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보고를 받았다. 미군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트루먼]] 대통령이 휴가 떠나있는 것을 필두로 [[장관]], [[참모총장]] 등 모든 지휘라인이 부재 중이었다. 미국은 한국에는 산이 많고 그나마 조금 있는 평지들이 죄다 질펀한 논바닥이라서 전차가 기동하기 힘들 것이므로 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와 같은 대규모 전차전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이는 교량 하중 문제도 그렇고 이후 UN군 전차가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에도 대규모 전차전은 없었다는 점, 당시 전차 중 가장 성능이 좋았던 영국군 센츄리온 Mk.3이 중국군의 습격보다 논 한가운데에서 아주 고생을 했다는 점에서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여기에 더해서 2차 대전 당시에도 산악 지역에서 대규모 기갑전력이 교전하는 일이 적었다. 프랑스 침공 당시 아르덴 산맥으로 통과하던 독일군 선봉 기갑부대들도 정해진 도로로만 기동할 수 있어 심각한 교통정체를 겪어야 했으며 훗날 1944년 12월부터 1945년 2월까지 연합군이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도 아르덴 일대에서 벌어진 아르덴 대공세와 휘르트켄 숲 전투에서 독일과 연합군 양측 모두 울창한 숲과 산 때문에 기갑전력들이 장점인 기동력을 살리지 못하고 대전차무기와 공군에게 맞추기 좋은 표적으로 전락했었다. 그러나 동일한 생각을 했던 소련군사고문단은 북한의 전차 요구를 절반으로 삭감했지만 전차 지원은 제대로 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생각이 너무 짧았음이 바로 드러난다. 산악지대건 뭐건 간에 전차를 보유한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의 전투력 차이는 심각해진다는 점을 망각한 것이다. 또한 미군은 북한의 전차는 대전차지뢰, 2.36인치 [[M9 바주카]]와 [[6파운더#s-6.1|57mm 대전차포]] 정도의 대전차 화기면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공격용 무기'를 제외하면 미국이 한국에 줄 대전차화기는 저거 말고는 딱히 없었다. 세계 최강의 기갑 전력을 보유했던 독일과 전쟁을 벌인 미국이 왜 대전차화기가 6파운더 밖에 없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당대 독일군은 Pak 40, Flak 36, 판저 파우스트, 판저 슈렉을 사용하여 연합군을 괴롭혔으며 소련군의 ZiS-3, 영국군의 크고 아름다운 17파운더도 전장에서 크게 활약했는데 미군의 대전차 전술은 공군의 공중 지원과 셔먼 파이어플라이, M10 울버린 대전차 자주포 같은 강력한 펀치력을 갖춘 대규모 기갑전력을 투입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미군이 공격용 무기이자 산악지역에서 적절하지 않은 기갑전력을 제외하고 나면 남아있는 쓸만한 대전차포는 이미 2차 대전 당시에도 판터와 티거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못한 6파운더가 최대였던 것이다. 미군이 준 대전차포는 구일본군의 [[치하]]같은 폐물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북한이 보유한 소련제 [[T-34-85]] 전차들을 상대로도 이론상 320m 이내에서는 전면에서 유효타를 먹일 수 있는 장비였다. 그러나 이론상이라는 말 그대로 실제로 저렇게 초근접을 하면 전차의 주포탄과 공축기관총 세례를 선제공격으로 맞아서 인수분해당하기 딱 좋다. 백선엽 장군 등의 회고에서는 철갑탄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였고 이런 주장이 제법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직접 57mm 대전차포를 운용했던 참전용사들의 회고에는 분명 철갑탄을 사용했다고 나온다. 다만 철갑탄보다 고폭탄이 압도적으로 더 많았다는 증언이 있고 미 군사고문단의 장비 검열 기록 등에 기재된 내용을 봐서는 철갑탄이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더해서 미국이 [[6파운더]]를 라이센스할 당시에 가장 강력한 관통력을 가진 [[분리철갑탄]]은 명중률이 낮다고 생산을 안하는 뻘짓을 한데다가 기존의 철갑탄은 '''착탄각도가 30도만 넘으면 탄자가 붕괴되면서 관통불가'''사태가 나므로 경사장갑에는 대응이 사실상 어렵다는 점도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영국은 이미 이런 결과를 노획한 [[6호 전차 티거]]로 실험해본 후 6파운더는 답이 없다고 느끼고 [[17파운더]]로 대전차포 주력을 이동한 지 오래였는데도 이걸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57mm M18 무반동포와 60mm M9 바주카는 대전차전에서는 6파운더보다 더 답이 없었다. 구경이 작아서 제대로 정타를 때려도 관통력이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경사장갑을 상대로 착탄시에는 포탄의 형상 때문에 일단 도탄현상을 일으켜서 튕기는 상황에서야 발화하므로 메탈제트가 장갑이 아닌 허공을 상대로 발사되므로 안그래도 빈약한 장갑관통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덤으로 불발탄 확률도 높아서 착탄시 발화가 안되는 경우까지 많았다. 국군 대전차반들은 미군들의 호언장담을 철저히 믿고 있었기에 굴러오는 전차들을 사정거리 내로 끌어들여 정확히 사격을 했으나 전차가 끄떡도 하지 않자 [[멘붕]]에 빠져버렸다. 포병대가 나서서 [[M3 105mm 경곡사포]]로 적 전차에 직접 조준 사격까지 해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당시 국군의 유일한 기갑전력이던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까지 동원되었지만 이 역시 T-34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전차지뢰도 미국이 거의 공급하지 않았다. 개전 당시 사용가능한 대전차지뢰는 국내에서 시험생산한 180개가 전부였고 이걸로는 길목 몇개 막기에도 부족했다. 대전차지뢰는 미군이 지상군을 참전시킨 후에나 미군 사용분으로 조금씩 들어왔다. 대전차지뢰로 길목을 차단하고 매복한 대전차포를 사용한다는 기존전술이 작동할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래도 미국이 6파운더 일반철갑탄이라도 긴급공수해온 후에는 청주 전투(1문으로 T-34 3대 격파)[[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254154822|예시]]나 수원 화성에서의 교전(대전차포로 1대, 대전차 지뢰로 2대 격파) 그리고 개전 초기 7사단의 방어전에서의 활약(보병과 포병의 협동으로 다수의 전차를 돈좌 및 격파)을 보면[[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254154822|예시]] 충분한 탄약과 훈련을 받은 병력들이 좀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763433230|예시]] 전차가 없는 전선에서도 열세였다. 당시 [[백선엽]] 장군의 동생 [[백인엽]] 대령이 연대장으로 있던 [[대한민국 육군본부]] 제17연대는 황해도 옹진반도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공격해온 북한군은 전차가 10대로 적은 편이긴 했으나 방어하던 국군 17연대의 3배에 달하는 병력과 포병, 장갑차 등 압도적인 전력이었다. 17연대는 [[옹진반도 전투]]에서 전력을 다해 항전했으나 끝내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없게되자, 해군이 급히 파견한 상륙함 [[천안함#s-1|LST-801 천안함]][* [[함장]] 김옥경 [[대위]].]과 소해정, 징발한 민간 선박을 타고 해상을 이용해 하루만에 인천으로 남은 병력이 무사히 철수하였다. 원래 옹진반도는 38선 이남 지역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퇴로가 바다밖에 없었던 것과 전체 상황등을 감안할 때 비교적 성공적인 탈출 케이스였다. 이후 17연대는 낙동강으로 물러서기까지 말 그대로 용전분투하면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대한민국 해병대]]가 아닌 [[대한민국 육군]] 부대임에도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국군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당장 수적으로도, 장비로도 열세인 상황에서 농번기로 인한 대규모의 외박, 외출로 38선에 실제 배치된 병력은 편제보다도 더 적었고, 여기에 [[채병덕]]을 비롯한 군 수뇌부의 안일한 대처가 겹치면서 그나마 있는 전력조차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수적 부족으로 인해 당시 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을 투입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는데 당시 사관학생들은 1기생과, 2기생을 나누어 장교 교육을 이수하고 있었고, 1기생들은 교육이 거의 끝나 20일뒤 자대배치가 정해졌고, 2기생들은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1기생이 262명, 2기생이 277명 총합 539명으로 기타 지원 병력을 포함해 634명의 1개대대를 창설해 [[내촌-태릉 전투]]에 투입했다. 하지만 수적으로도 2배 이상 차이나는 북한군에게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고 훈련도 제대로 못받은 2기생들과 아직 자대 배치도 못받은 1기생들로만 이루어진 급조된 대대가 제대로 된 전략이 있을리 만무했으며 무엇보다 전선에 투입된 다른 부대들에게 대부분의 무기를 지급했기에 이들이 가진 무장은 M1 소총, 경기관총, 박격포 소량이었다. 그나마도 소총이 성능이 좋아도 실탄이 56발 지급됐고 박격포탄 역시 50발 정도만 지급된 수준. 결국 첫전투에서 1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후퇴했다고 한다. 게다가 사기 진작 차원에서 국군이 반격에 성공하여 [[해주시]]로 진격하고 있다는 오보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오보가 이후 [[북한]]의 북침설에 악용된 것은 안 봐도 비디오. 심지어 [[제1보병사단|제1사단]]장 [[백선엽]]은 이 오보가 진짜인 줄 알고 전선을 맞추기 위해 북진했다가 [[삼팔선]] 근처의 적 후방 지역에 고립되기도 했다. 그나마 [[문산읍(파주)|문산]]과 [[파주시]] 봉일천 방면에서는 [[백선엽]] 대령의 [[제1보병사단]]이 건투하고 있었고, [[춘천시]]와 [[홍천군]] 방면에서는 [[김종오]] 대령의 [[제6보병사단]]이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있었으며 [[이성가]] 대령의 [[제8기동사단|제8보병사단]]이 강릉-주문진에서 분투하고 있었다. 사실 전방 4개 사단중 1사단, 6사단, 8사단은 각자 제자리를 지키고 열심히 싸우고 있었다. [[제1보병사단|1사단]]은 임진강 선을 바탕으로 서울 함락 시점까지도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고 [[제6보병사단|6사단]]은 포병으로 북한군 1개 군단을 초토화시키고 있었으며, [[제8기동사단|8사단]]은 대관령이라는 지세를 이용하여 군사력을 보존하고 강릉을 재탈환하는 등 건실한 방어를 보이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 주공인 [[포천시]]/[[동두천시]]-[[의정부시]] 축선. 이 축선은 계곡을 따라 개활지가 펼쳐진 데다 서울로의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침공회랑으로 딱 알맞은 곳이었다. 포천-의정부 축선은 [[3번 국도]]와 [[경원선]] 철도가 있는데, [[추가령 구조곡]]의 영향으로 이 일대는 3번 국도와 경원선 철길을 제외하면 '''당시에는 아예 길이 없었다'''. 그래서 3번 국도는 해방 직후 [[미군정]] 시절부터 한 차례 개수를 하여 [[1번 국도]]([[통일로]] 연선)나 [[5번 국도]]([[춘천시]]-[[홍천군]]), [[7번 국도]]([[동해선]]) 연선보다 도로 상태가 괜찮았고, 바로 이 3번 국도가 바로 북한의 주 침공 루트가 되고 말았다. 이 3번 국도 라인으로 인한 [[6.25 전쟁]] 트라우마로 인해 전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동두천시]]-[[포천시]]-[[연천군]] 등 3번 국도 연선을 오히려 쇠퇴시켰고, [[2022년]] 3번 국도 연선 일대는 매우 낙후하게 되었다. 3번 국도와 나란히 가는 [[세종포천고속도로]]가 [[2017년]]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이 3번 국도 방면을 지키고 있던 건 [[유재흥]] 사단장이 지휘하는 [[제7보병사단]][* 당시 명칭은 (구)수도사단이었고, 한강 방어선 이후 수도 명칭과 1연대를 수도경비사령부에 넘기고 한동안 해체되었다.] 휘하의 2개 연대였다. 정상적이라면 3개 연대가 있어야 하지만 당시 사단 예비였던 3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로 예속이 변경되고, 대신 충청남도 온양에 주둔중인 2사단 25연대가 배속되어 6월 15일까지 의정부로 이동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러나 25연대는 주둔할 병영 문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도 오지 못한 채 경상도 빨치산이나 소탕하고 있었고, 이 상태로 개전을 맞이한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7사단은 그야말로 총제적인 난관이었는데, 25연대 배속 문제로 참모장 등 적지 않은 사단 본부 인원들이 파견나가 있었고, 그 외 고군반 교육 받으러 서울에 있던 정보참모라든가 및 연락 두절로 인한 소재 파악이 안 되던 군수참모 등으로 사단에 고위 간부라곤 유재흥과 작전 참모밖에 없었다. 이렇게 약화된 7사단 정면에는 북한군 3, 4, 15사단과 105전차여단 예하 전차연대 둘이 투입됐다. 특히 [[포천 전투]]에서 9연대 2대대가 [[계란으로 바위치기|대전차 무기 없이 소총과 기관총만으로 전차에 맞설 동안]] 대전차 중대가 만세교 남쪽에 대전차포 방열을 하고 초탄을 명중시켰으나, 장갑을 뚫지 못해 겨우 조준경만 빼들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편 이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에서 3연대와 25연대가 올라왔으나, 이들조차도 축차투입으로 찰나의 시간만 번 채 차례차례 의정부로 밀려나 [[의정부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6월 27일 새벽 1시에 비상국회를 연 신익희 의장은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전황을 물어보았는데 신성모는 수도 이전을, 채병덕은 수도 사수를 주장하였다. 이에 국회 내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신성모와 채병덕은 자리를 떴다. 이후 엄청난 논쟁 끝에 결국 수도사수결의가 채택되었는데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대구를 거쳐 다시 대전으로 돌아와 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국회의 수도사수결의는 전달되지 못했다. 한편 신성모와 채병덕은 [[김홍일(군인)|김홍일]], [[이범석]], [[지청천]], [[김석원]]을 초대해 군사원로자문회의를 열었다.[* 이응준은 기차편으로 상경하느라 불참.] 김홍일은 다른 3인의 지지를 받으며 한강선 방어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채병덕은 동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의 찬성을 얻어 서울 사수와 의정부 방면 역습을 밀어붙였다. || 이름 || 출신병과 || 직책 || 주장 || || 채병덕 || 일본 육군 ||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육군총참모장]] || 결전 || || 신성모 || 영국 해군 ||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 결전 || || 김홍일 || 국민혁명군 || [[육군 참모학교 교장 ]] || 지연전 || || 유동열 || 한국광복군 || || 결전 || || 지청천 || 한국광복군 || 국회의원 || 지연전 || || 이범석 || 한국광복군 || 전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 지연전 || || 김석원 || 일본 육군 || 제1보병사단장 || 지연전 || || 이종찬 || 일본 육군 || 수도경비사령관 || 결전 || 채병덕의 고집대로 육본은 후방 3개 사단(대구 3사단 22연대, 대전 2사단, 광주 5사단)을 7사단 정면으로 축차투입하는 우를 범했다. 이 투입은 상당히 개판이었는데 5사단의 경우 15연대 3대대와 20연대 3대대는 1사단으로 보내버리고 15연대 2대대와 20연대 1대대를 7사단 정면으로 투입했다. 2사단은 3개의 연대를 도착한 순서대로 그냥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5사단 휘하 연대가 쪼개져서 축차 추입되는 바람에 당시 5사단 사단장은 자신의 연대가 어딨는지도 파악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는 안봐도 비디오. 북한군은 이 축차 투입되는 연대들을 차례로 분쇄시키면서 의정부 축선을 돌파해버렸다. 의정부 축선의 방어진지가 차례로 무너지면서 서울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었고,[* 그나마 전차도 못 뚫는 열약한 장비로 분투하던 국군 및 북한군의 삽질이 겹쳐 2일을 벌 수 있었다.] 마침내 전차가 서울 시내까지 진입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국군 공병대는 어떻게든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막아야 한다는 압박에 [[한강 인도교 폭파|한강 인도교를 폭파]]시켰다. 이 때문에 서부전선(한강 북방)에서 여전히 전투중이던 수경사와 1, 2, 5, 7사단은 조직적 철수 기회를 놓치고 개별적으로 한강을 도하, 후퇴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야포, 차량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중장비와 상당수의 병력을 손실한다. 특히 개성-문산 축선의 1사단은 우익의 의정부 방면 붕괴와 한강교 폭파 소식이 전해지지 않아 포위 직전에 개개인별로 흩어져서 한강을 도하하여 철수하여 부대 건제는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보유 중화기를 모두 상실하였고 병력의 손실도 막대하여 백선엽의 자서전에서 언급되기로는 개전 당시에는 8천명 이상이었던 부대가 한강 이남에서 재집결했을 때는 약 1,000~2,000명 수준으로 급감했다고 한다. 물론 한강 이북의 7만의 병력이 다 전멸하거나 포로로 잡힌 것은 아니고, 상당수는 전선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숨어 지내다가 국군이 반격에 나선 뒤에 하나 둘 합류했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한국전쟁 내내 반복된다. 다만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 급한 상황에서 병력이 흩어지고 중장비를 손실한 것은 매우 큰 손실인 것은 자명하다. 국군 10만 중 3만은 후방지원부대여서, 2만은 6, 8사단, 5천은 한강이남 대전의 17연대와 영등포의 독립기갑연대, 그리고 15연대 3대대같은 후방경계부대, 그러면 4만 5천중 2만7천은 29일까지 한강도하 성공, 서울에서 숨거나 7월에 복귀한 숫자를 합하면 실제 피해는 약 16,000명이다. 7만 전원 전사설은 거짓이다. 한편 중동부전선 춘천과 강릉에선 6사단과 8사단이 지연전과 역공을 병행하며 부대 건제를 유지하며 철수를 진행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부전선에서는 [[김홍일(군인)|김홍일]] 장군이 한강 이남으로 개별적으로 철수한 부대들을 모아 [[시흥지구전투사령부|혼성 부대를 급조]]해 국군 재편성을 진행하면서 강북의 북한군과 대치한다. 이 과정에서 혼성 부대라 지휘 체계가 제대로 안 잡히는 등 문제가 많았지만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한강 방어선 전투|한강 이북의 북한군의 진격을 약 1주일 지연]]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미군 병력이 투입될 때까지 나름대로의 성과를 내었다. 이 영향으로 사흘만에 남한의 [[수도(행정구역)|수도]]인 서울이 함락되면서 전쟁이 조기에 북한군의 승리로 종결될 가능성이 보였으나, 미국이 하루 전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해 UN군 파병을 결정하면서 전쟁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50년 6월 27일 유엔 안보리 회의.png|width=100%]]}}}|| ||<:>{{{-1 1950년 6월 27일 열린 유엔 안보리 회의. 소련의 불참 속에 남한에 대한 파병을 결정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3호]]가 통과되었다.}}}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개전 당일인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2호|결의안 제82호]]에서 북한군의 철병과 유엔 회원국의 북한에 대한 지원 금지를 결의했고, 개전 사흘 째인 2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3호|결의안 제83호]]에서 원상회복을 필요한 군사적 지원을 남한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제84호|결의안 제84호]]에서는 미군이 지휘하는 유엔군사령부를 통해 군사와 자원을 지원할 것을 결의했다. 냉전이 끝날 때까지 소련은 미국의 참전을 반대했으나, 소련이 의도치 못하게 불참하는 바람에 파병안이 가결된 것이라는 게 근 40-50년간 정설처럼 다루어졌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기밀 해제된 스탈린 정권 당시의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한국전쟁에 북한을 도와 참가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가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한국전 개입을 지속하고 중국 또한 한반도에 끌려들게 된다면 어떤 결과가 올지 생각해보자"며 "유럽에서 공산주의를 강화할 시간을 벌고 우리에게 국제 세력균형에서 이득을 안겨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인 의미이기도 하지만, 당시 소련은 유럽에서 불원간 미-서유럽 동맹과 공산권의 무력충돌이 일어날 경우 전력 면에서 소련이 열세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202292|예시]] 단 이는 전쟁이 이미 시작된 뒤에 보낸 편지라는 점에 주의하자. 스탈린의 주장은 '변명'일 가능성도 크다. 이 가설에 대해선 [[소련의 미국개입유도설]] 문서를 참조. 그리고 이 역시 관점의 차이인데, 당시에는 UN이 [[타이완섬]]에 있는 [[중국국민당]]의 [[중화민국]](대만) 정부만을 공식적인 중국 정부로 인정했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UN에 참가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해줄 때까지 UN 활동에 불참하겠다고 선언하고 유엔의 모든 회의에 대해서 계속 [[보이콧]]하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상임이사국은 소련의 불참을 상임이사국의 거부권(비토) 행사가 아닌 불출석에 의한 기권으로 해석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